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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유영번역상 수상 소감
관리자  (2021-12-10 12:05:28, Hit : 301, Vote : 7)

수상 소감

 

  번역가로서의 제 삶을 돌아보니, 어두운 무대 한 구석에 구부정하니 앉아서 목을 길게 빼고 흐릿한 조명에 의지하여 텍스트를 들여다보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한결같은 시간을 보내온 듯합니다. 저는 그저 책이 좋아 무작정 이 길로 들어섰습니다. 흔히 말하는 취미가 직업이 된 경우이며, 제가 사랑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박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정적과 고독이 감도는 작은 무대에서 저는 많은 작가들을 만나왔습니다. 저에게 이 영광스런 상을 안겨준 피터 케리를 비롯하여 유진 오닐, 애니 프루, 조이스 캐롤 오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이언 매큐언, 필립 로스, 메리 올리버 등 수십 명에 이르는 작가들. 작가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제가 오래 전부터 독자로서만 만나다가 최근 에세이집 번역을 맡아 더 특별한 만남의 기쁨을 누리게 된 작가 폴 오스터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한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소설이 작가와 독자의 동등한 공동작품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 대화를 나눠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독서가 작가와 독자의 내밀한 정신적 대화이며 독자는 이 과정에서 작가와 더불어 지적이고 예술적인 창작행위를 한다는, 마음을 깊이 울리는 말입니다. 번역가는 이런 신성한 행위를 시작한 독자들이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세심하고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에 작가와 더 철저하게 소통하게 되며, 번역자로서 만난 작가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이렇듯 세계적인 대작가들과 특별한 만남을 가져왔으니 저는 축복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유영학술재단에서 보내준 자료집을 읽으며, 저는 참으로 뜻깊고 아름다운 상을 받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생을 교육자이자 번역가로 사셨던 고 유영 교수님의 유지를 받들어 만들어진 상이기에 그분의 삶에 대해 알고 싶었고, 영문학자로서, 그리고 문인으로서 그분이 이루신 무수한 업적들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특히 따님의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은 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강인한 의지와 철저한 절약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간이 필요로 하는 최소의 물질로 생을 영위하면서 광대한 정신세계에서 사신 분”이라니, 그런 분의 정신이 깃든 상보다 더 뜻깊은 칭찬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이 상의 열다섯 번째 수상자로서 역대 수상자들의 소감글도 흥미롭게 읽어보았는데, 저와 닮은 점들이 참 많아서 뜨거운 동지의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번역의 가시밭길에서 조용히, 치열하게 정진하는 그분들이 몹시도 아름다워 보였고 그 아름다운 이들 틈에서 저도 덩달아 아름다워진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제가 이 뜻깊고 아름다운 상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 빛나는 원작 덕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와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써온 작가 피터 케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로빈 후드로 칭송받아온 네드 켈리의 인생에 주목하게 됩니다. 1854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에서 태어난 네드 켈리는 아일랜드에서 강제 이송된 죄수의 아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스물여섯 살에 교수형을 당합니다. 그는 산적이자 무법자였지만, 영국인들의 압제에 맞서 약자의 편이 되어주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용감히 싸운 영웅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길이 남게 됩니다. 작가 피터 케리는 ‘제릴데리 레터’라고 불리는 네드 켈리의 56페이지 분량 자필 회고록에서 영감을 얻어 네드 켈리가 딸에게 이야기하는 자서전 형식의 소설을 썼으며, 구두점을 과감히 생략한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 넘치는 문체로 네드 켈리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구현해내어 그의 생애 두 번째 부커상을 수상합니다. 저는 편집자에게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번역원고를 넘기며 이런 메모를 달았습니다. “이 작품은 거칠고 투박하며 문법에 어긋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생생한 감동을 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요. 가독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작품의 개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원작을  충실히 옮기고자 애썼고 그런 노력이 이와 같은 명예로운 결과로 이어져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다음으로는, 문학동네 편집자님들께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제 번역원고의 첫 번째 독자로서 저의 무능함과 나태함이 빚어낸 아찔한 실수들을 바로잡아주고 제 글이 반짝반짝 빛나도록 정성을 다해 다듬어주시는 편집자님들은 제가 마지막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파트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려 저의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인이 되신 지 오래지만 늘 제 가슴속에 살아계시는 부모님, 따뜻하고 든든한 형제자매, 묵묵히 응원해주는 남편, 제 삶에서 언제나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두 딸, 볼 때마다 흐뭇한 사위, 석 달 전에 세상에 나와 제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천사 같은 손자,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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